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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포터 애벗의 '서사학 강의' 독후감

세 가지 읽기 방식(의도적·징후적·적용하며 읽기)과 해석

by 명현 에디터 2025. 1. 17.

서사 읽기에는 세 가지 읽기 방식이 있다.

 

세 가지 읽기 방식(의도적·징후적·적용하며 읽기)과 해석

 

의도를 헤아리며 읽기

 

하나는 내포저자의 의도를 헤아리며 읽기이다. 서사 텍스트를 하나의 통합체로 보는 방식으로 이는 내포저자가 서사담화의 배후에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내포저자는 창조적 감수성을 지닌 단일한 실체이다. 또한 이 읽기는 해석은 (통합체로 가정하는) 텍스트의 전체 해석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의도를 헤아리며 읽는 방식이 곁텍스트에서 해석의 실마리가 되는 힌트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곁텍스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없다고 해서 징후적 읽기와는 다르게 해석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이미 통합체인 서사 텍스트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징후적 읽기

 

징후적 읽기가 있다. 징후적 읽기와 징후적 해석은 정신분석 비평, 마르크스주의 비평 등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서사담화의 바깥에 있는 곁텍스트를 적극 활용하여 서사담화를 읽어 내려가는 방식이다. 따라서 이 읽기에서는 서사의 배후에 있는 이는 내포저자가 아닌 실제저자이고 실제저자의 생애와 시대가 텍스트 해석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실제저자는 내포저자로 의도한 것과 징후적 읽기로 드러내는 것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

 

H.포터 애벗의『서사학 강의』를 교재로 삼았던 교수님은 방학 때 프로이트 전집을 읽어보라고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문인이라면 그 정도는 다 읽어야 한다고 했었다. 교수님도 프로이트 전집으로 스터디를 했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도 징후적 읽기의 방식으로 다른 비평들을 언급하는데 그 비평들은 정신분석 비평마르크스주의 비평을 혼합해서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로이스 타이슨의『비평이론의 모든 것』을 교재로 삼았던 강의도 있었다. 그 강의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비평들을 다루고 있고 장마다 다루는 비평의 관점으로 작품의 분석을 직접 시도했었다.

 

적용하며 읽기

 

적용하며 읽기가 있다. 적용하며 읽기는 징후적 읽기를 넘어서서 텍스트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읽는 방식이다. 해석으로 새로운 읽기 또는 스토리를 창조하는 것으로 이 읽기가 다소 부정적으로도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저자는 비평가 해럴드 블룸의 "모든 위대한 예술 작품은 필연적으로 선배 예술 작품에 대한 강력한 오해의 소산"이라고 한 말을 예시로 든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위대한 작가들뿐만 아니라 모든 저술가들은 스토리를 취해서 자신의 방식으로 고쳐 쓰는 과정에서 적용하며 읽는 해석에 깊이 관여한다."라고 저자는 말했다. 또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든 해석에는 창작을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다. 적용하며 읽기도 스토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하나이다.

 


 

이 읽기라는 것이 텍스트가 아닌 사람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대상은 살아있는 사람으로 사람을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로서 읽기는 크고 작은 오해가 생겨나는 것 같다. 문예적인 서사 장르를 읽고 해석하는 것에서도 다양한 해석이 있는데(징후적 읽기와 적용하며 읽기가 아닌 내포저자의 의도를 헤아리며 읽더라도 완전히 일치된 해석은 해석의 과정에서 다소간의 창작으로 인해 완전히 일치된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차이의 정도가 다른 읽기 방식과는 해석의 차이는 존재한다) 사람이 대상이 되면 오해의 가능성이나 폭이 넓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자연스럽다. 가장 먼저는 사람을 사귀는 것에 있어서 판단이 없이 깊은 관계로 들어가게 되면 그 관계의 결과가 위험해질 수 있다. 나만이 아니라 사귐의 대상이 되는 상대방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가능하면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지혜로운 처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알아가는 것 없이 모든 사람이 가족과 같은 관계가 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사람을 알아가는 것에 있어서 크고 작은 오해의 발생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오해의 악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 방법이 타인의 삶에 무례하게 개입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의도를 헤아리며 읽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보내는 것이다.

 

타인에게도 나와 같은 사람이므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자유롭게 개척하고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내가 아닌 그 사람에게 있다. 따라서 내가 만약 허락받지 못한 상태에서 타인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것은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타인이 자기 삶에 개입을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개입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 타인도 나도 분명히 알 수 없기에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이러한 이유로 타인의 삶으로의 개입이 그 사람의 안녕을 위한 선의로 시작했던 것이라도 타인에게 무례함으로 다가들 수 있고 서로의 관계와 영혼에 상처로 남을 수 있다.

 

따라서 타인의 삶에 개입해서 사람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에 대화나 놀이나 활동에 전념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 사람의 의도를 헤아리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인데 그것은 징후적인 읽기의 분석이 아닌 전적으로 대면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집중하며 마치 함께 새로운 텍스트를 만드는 것처럼 함께 어울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타인의 삶에 개입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인이라면 뒤로 물러나서 그 사람을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할 것이다. 함께하는 시간에도 내가 그 사람에게 원하고 바라는 변화를 이끌기 위한 시도로서의 언동을 하기보다는 그의 의도를 헤아리며 함께할 것이다. 그 사람도 그 사람만의 고유한 내면의 여정을 걷고 있는 나와 같은 인간이고 진정한 변화는 의지나 타인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