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은 서사를 구성하고 있는 힘 그 자체이다. 서사적 수사학의 효과는 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거의 모든 이야기에 갈등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갈등을 지칭하는 단어는 아곤이었다. 주동인물과 반동인물은 그리스 비극의 서사에서 아곤 안에 위치했다.
갈등은 친숙한 단어이기도 하다.
소설 같은 삶이라는 표현은 갈등으로 인해 그 삶에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갈등이 소설처럼 일상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면 그 사람은 아마도 크게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사람에게도 이야기는 있고 그것이 소설과 같은 서사의 모체이기도 하고 갈등 역시 그 안과 밖에 반드시 존재하지만, 나날을 소설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상상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문화에도 갈등이 반드시 존재한다.
서사에서 갈등의 끝은 존재하거나 부재한다. 이를 갈등의 종결(closure)이라고 표현하는데 서사의 끝과는 별개로 존재한다(갈등은 종결과 함께 보아야 한다. 서사 안에서 갈등의 처리 방식을 알 수 있어서이다). 서사의 끝은 끝(ending)으로서 서사담화가 끝나는 지점이다.
서사학에서 종결과 끝을 구분하는 것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도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서사담화는 분명 끝(ending)이 있다. 그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이든 지루한 것이든 마지막 페이지는 반드시 있다. 그러나 서사담화로 우리 마음속으로 중개되는 스토리는 발생하고 나면 어떤 작용으로 인해 마음에 남겨지는 것이 아닌가. 그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이자 힘이 갈등이라고 했을 때 그 갈등의 끝을 종결이라고 엔딩과 구분하면 내 마음에서 물결을 일으켰던 이야기와 그 물결에 대해서 보다 명료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종결은 두 가지 층위로 존재한다.
기대층위에서의 종결과 질문층위에서의 종결이 그것이다.
기대와 종결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건 어떤 장르 혹은 패턴이나 마스터플롯(원형)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다음의 사건을 기대하며 읽는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가 소설의 표지나 광고를 보고 내가 원하는 장르의 책이라고 기대하며 책을 펼쳤는데 읽다 보니 내가 원하는 장르의 이야기가 아닌 전혀 다른 장르의 이야기로 전개되면 속았다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일으키는 기대가 있는데 기대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 장르적 클리셰로 점철된 이야기라면 그것은 기대의 생동감을 떨어트린다. 기대의 생동감인 놀라움은 클리셰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체험하면서 경험한다.
이야기의 기대가 내가 기대하는 상황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상황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드러나거나 암시가 있다면 기대가 일으키는 서스펜스이다. 서스펜스는 종결의 결핍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야기는 장르적 문법을 따르면서도 의외성이 있고 갈등의 상황이 쉽사리 종결되지는 않는 서스펜스가 있는 이야기가 흡입력이 있다. 장르적 문법에 오히려 영향을 주는 경지의 이야기도 있을 수도 있지만 갈등이라는 서사의 힘은 여전히 그 안에서도 유효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독해는 다르다는 점이다. 기대층위는 사람마다 다르다. A에게는 클리셰인 사건이 B에게는 신선하고 흥미로운 사건으로 읽힐 수 있다. 이하에서 서술할 질문층위 또한 마찬가지로 서사를 따라가며 떠오르는 질문들이 사람마다 다르다.
질문과 종결
이 세계는 어디일까? 사건의 실체는 무엇으로 드러날까? 누가 사건과 관련되어 있는가? 는 질문층위에서의 질문이다. 이 질문의 크기는 가난하고 헐벗었으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은 부도덕한 일을 벌여도 되는가? 같이 커질 수 있다. 질문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계속될 수 있는데 이는 답변 또한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질문층위에서의 질문은 다음 사건의 발생에 대한 기대가 아닌 깨달음을 예상한다는 점에서 기대층위와는 다르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에 물결을 일으켰던 것은 갈등이었고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기대층위에서의 놀라움과 질문층위에서의 깨달음이었다.
프란츠 카프카와 악몽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소송』은 여러 차례 읽어도 매번 의식을 가진 채로 악몽을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저자는 종결의 부재를 설명하며 카프카와 그의 단편소설인「일상적인 혼란」를 함께 다룬다. 카프카는 카프카적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하나의 장르로서 여겨진다. 카프카의 작품에서는 서사담화가 끝나는 지점에 도달해도 생성된 질문들에 대해서 명쾌한 답변을 할 수 없다. 오히려 서사담화의 끝에서 질문들이 배가 된다. 이는 카프카의 소설을 읽으면서 경험했던 그것이다. 그의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이야기에 대한 질문들이 여전히 남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들을 답하기 위해서 다시 읽어보지만, 오히려 새로운 질문들이 나타난다.
이번에 카프카의 유명한 소설「변신」을 서사학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읽어 보았다. 이 소설은 일어나 보니 괴상한 벌레가 되어버린 그레고르 잠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레고르는 출장 외판원이라는 점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출근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 소설의 초입에서 주어진다. 초입에서부터 갈등이 나타나는 것이다. 악몽과 같은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다시 읽으면서는 인간이 처한 조건을 그리려는 도구로 악몽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을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사건사고가 실제로도 벌어지고 있지 않나. 라는 의문이 들었다. 기대했던 것대로 아니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대로 그레고르는 결과적으로는 가족으로부터 소외되어 가다 죽는다.
혹은 가족에 의해서 그레고르가 죽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었고 벽과 천장에서도 몸을 붙여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데 창문 바깥으로 탈출하지 않는다. 점점 더 그레고르는 자기 자신이 가족의 구성원이 아닌 벌레로 취급되어 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족의 집에서 머문다. 그레고르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레고르가 인간이 다시 되었다면 어떤 일을 벌였을까? 계속해서 출장 외판원으로서 삶을 살았을까?
그레고르의 죽음 이후로 가족의 삶의 행방은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의문도 있다. 벌레인 그레고르가 죽자, 그들은 정말 해방감을 느꼈을까? 희망은 얼마나 갈 것인가. 부모님이 그레고르의 누이인 그레테에게 어울리는 남자를 찾아주었을까? 왜 그레고르가 죽은 당일에 그레테의 젊음에 대한 재발견과 함께 미래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인가.
이처럼 카프카의「변신」은 종결이 부재함으로써 질문이 남는다.
'H.포터 애벗의 '서사학 강의'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 가지 읽기 방식(의도적·징후적·적용하며 읽기)과 해석 (0) | 2025.01.17 |
---|---|
서사란 "혼란에 맞서는 일시적인 유예"라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말 (0) | 2025.01.14 |
내포저자와 서사의 틈과 해석 (0) | 2025.01.13 |
서사의 서술자와 신뢰성 (0) | 2025.01.10 |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서사적 수사학의 효과와 장치 (0) | 2024.12.26 |
서사와 삶의 경계 그리고 액자서사와 곁텍스트의 의미 (0) | 2024.12.24 |
서사의 구별: 구성적 사건과 보충적 사건, 서사성 (0) | 2024.12.22 |
서사를 구성하는 스토리와 서사담화 그리고 스토리의 진실성 (0) | 2024.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