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란 사건의 재현이다."는 서사에 대한 H.포터 애벗의 정의는 설득력이 있다.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폭넓은 시각을 제공한다.
서사에 대한 정의를 인과적인 관계가 있거나 없는 두 가지 이상의 사건의 연속이라거나, 반드시 서술자가 있어야 하는 등 보다 광의적인 정의이다.
이 정의에서 서사는 서사적 단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서술자가 서사담화의 일종으로 카메라나 연기자와 같은 스토리를 전달하는 하나의 장치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전체적인 구조를 제공하는 소설이나 시, 드라마 등의 문예적인 장르를 이 광의적인 서사 개념으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사건의 재현인 서사는 스토리와 서사담화로 구성된다.
스토리와 서사담화
스토리란 사건 혹은 사건의 연속이고, 서사담화는 재현되고 있는 사건을 의미한다.
비서사 장르에서 에세이는 내부적 시간이 무시간적이거나 정지되어 있다. 에세이는 구조적인 순서와 함께 그것을 읽어 내려가는 외부적 시간이 있을 뿐이다.
반면에 서사에는 시간과 사건의 순서가 있다. 독자가 외부의 기계적 시간 속에서 서사를 읽어가며 스토리를 동적으로 구성한다. 거기에 이야기의 시간과 사건의 순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현실에서 살고 있지만 또 다른 세계로 진입한 것과 같은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 이처럼 스토리는 독자에 의해서 생성되어서 향유된다.
따라서 서사의 스토리를 이해하는 건 서사담화로 글을 풀어나가는 작가의 역량도 있어야 하지만 서사를 읽어나가는 독자의 능력도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분명 사건들이 누적되고 있는데 이것은 어떤 스토리이고 내게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가. 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은 독자에게 달려 있다.
정말로 흥미로운 것은 스토리는 서사담화로 재현되기 전에는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
즉 지금까지 말한 스토리는 독자나 청중이 서사담화를 통해 재현되는 작품에 대한 이해로부터 생명력을 갖는 것이 아닐까?
그 이유는 어느 한 작품을 동일한 시공간에서 함께 읽더라도 거기에서 얻는 스토리는 독자마다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는 데에 있다.
또한 스토리와 서사담화의 사건의 순서와 시간은 다를 수 있다.
"나는 일어나서 정원을 가꾸러 나갔다. 한나절을 보내고 난 후에 집으로 돌아와 딸과 함께 애플파이를 먹었다. 밤에는 텔레비전에서 중계하는 야구를 소파에 몸을 묻은 채 보았다."
"나는 밤에 텔레비전에서 중계하는 야구를 소파에 몸을 묻은 채 보았다. 딸과 함께 애플파이를 먹은 후였고, 그전에는 한나절 동안 정원을 가꾸었다."
이 두 텍스트의 서사담화의 시간과 사건의 순서는 거꾸로 전개되지만(스토리는 거꾸로 흘러가지 않는다. 스토리를 재현하는 서사담화는 시간의 배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서사담화가 전달하는 스토리는 가능하지 않다.) 스토리 차원의 시간과 사건의 순서는 동일하게 흐르고 있다.
스토리: 사건과 실체
스토리는 사건과 실체로 구성된다.
사건의 발생 어떤 행위가 있었다는 것이고 행위가 일어나는 데에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 실체의 작용과 반작용이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반대로 실체는 사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서사세계 혹은 스토리세계가 스토리의 가능한 구성 요소로 보기도 한다. 사건이 일어난 배경으로서 서사세계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더욱 확장되고 정교해진다.
그러나 서사는 "초롱이가 뛰었다."가 유효한 서사인 것처럼 서 세계가 반드시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미약하지만 호소력 있는 작은 진실성을 간직한 스토리
진실한 스토리는 없다고 장 폴 사르트르는 말했다.
그의 말은 실제의 나에 대한 스토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서사담화도, 전달되는 스토리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스토리가 진실하게 들리는 이유는 내적 대화로 발화되는 내가 나에 관해서 쓰는 스토리와 닮았다는 데에 있다.
내가 나에 대해서 써 내려가는 스토리는 진실하면서도 완전한 진실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렵다. 운명적인 스토리가 아니다. 내가 작가이자 동시에 최초의 청중이 되고, 생명체이기에 변화가 있다.
5년,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것처럼 스토리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상태로 변화하고 있다. 내가 내 이야기에 대한 작가이지만 미래에 어떤 사건이 있을지 알 수 없다.
내 행위를 분류하고 그것의 결과에 대해서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예언하는 고서 격언도 있다.
거기에 담긴 지혜를 밥처럼 먹을 수 있다.
밝은 미래를 소망할 수 있다.
그러나 소망이 실현되는 건 나의 일이 아니다. 소망까지는 할 수 있겠고 애를 쓸 수는 있겠지만 미래에 어떤 사건이 있을지 그것을 미리 예언하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내가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자는 될 수 없다.
미래에 있을 사건은 알 수 없지만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일이다.
과거의 사건을 스토리로 이해하고 읽어내는 것에서도 세월에 따른 변화가 있다. 이는 동일한 책을 3년 전과 오늘의 내가 읽었을 때의 감상이 다른 것과 유사하다. 과거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스토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처럼 우리와 닮았기 때문에 서사담화를 통해 전달되는 스토리는 진실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진실함만으로도 그토록 호소력이 짙은 것이 아닐까?
또한 스토리는 선형적으로 흐르면서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다. 역으로 흐르는 스토리는 없다. 내 삶 또한 출생이라는 시작이 있고 중간이 있으며 죽음은 정해져 있다. 죽음에서 출발해서 시작으로 가는 인생은 없다.
그러나 삶에서 출생과 죽음 사이의 중간 지대의 삶은 정해진 것이 없다. 그러나 스토리는 실제의 삶과는 다르게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완결성이 있는 이야기를 서사담화로부터 중개된다. 그것을 실제의 삶을 살아가는 여정 가운데, 삶에 비추어 볼 수 있다는 것이 이야기가 지닌 신비스러운 매력으로 다가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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