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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포터 애벗의 '서사학 강의' 독후감

인간의 심층구조로서의 서사와 서사의 보편성

by 명현 에디터 2024. 12. 19.

서사는 보편적이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인간이라면 지닐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아침에 민주가 일어났다." 이 문장은 미시서사이다.

 

소설과 시와 드라마 등에서 나타나는 서사는 전체적인 구조를 제공하는 문예적인 서사 장르이다. 서사 장르는 인간의 삶을 재현해서 이야기를 전달한다.

 

어린아이부터 시작해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이야기를 향유한다.

 

인간의 심층구조로서의 서사와 서사의 보편성
생각하는 사람

 

심층구조로서의 서사 : 자아상과 정체성

 

서사 장르로서의 서사가 아닌 인간의 삶에도 서사가 있다. 이를 언어와 같이 인간의 심층구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서사적 심층구조는 자아상과 정체성과 연결 지어서 생각할 수 있다.

 

자아상은 "자신의 역할이나 존재에 대하여 가지는 생각"이다. 이 생각에도 명사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긍정적인 자아상 또는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게 되는 이유에는 동사, 즉 동적인 행위가 결합하여 있다.

 

정체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나의 서사이다.

 

"나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이다."

"나는 작가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이상의 문장에는 서사가 없지만 서사가 없는 IT 개발자와 작가, 대한민국의 국민은 없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이 생일 선물로 사주신 컴퓨터로 시작한 테트리스 게임 개발이 계기가 되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됐다."

"나는 중고 서점에서 풍기는 향이 좋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한 기분 좋은 감각이 나를 독서와 작문의 세계로 이끌었고 마침내 작가가 됐다."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살기에 참 괜찮은 나라이다."

 

이상의 문장에는 서사가 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알고 보니 초등학교 3학년 때 생일 선물로 컴퓨터를 받았다. 여기에서 컴퓨터를 생일 선물을 받은 것이 서사이다.

 

이 서사는 다음의 문장으로 확장할 수 있다.

 

"엄마는 아들이 도서관에서 컴퓨터 학습 만화에 푹 빠진 모습을 보고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다. 엄마는 그날 밤에 아빠에게 도서관의 나에 관해서 말했다."

 

작가의 예시는 중고 서점에 내가 방문했다는 것을 "나는 중고 서점에서 풍기는 향이 좋았다."로 유추할 수 있다. 독서와 작문을 세계로 표현함으로써 나는 글을 읽는 행위와 글을 쓰는 행위를 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으므로 서사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예시도 마찬가지이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와 작가와는 다르게 귀화민이 아니라면 태어나면서 주어지므로 서사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은 국민마다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다. 예시에서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대한민국을 긍정하고 있다. 그 비교라는 행위가 가능했던 건 내가 대한민국 외에 다른 나라를 학습해서 알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단어에도 서사를 부여할 수 있다. 대한민국으로 나라의 이름을 명명한 사건과 나라에 얽힌 역사는 서사이다.

 

이처럼 자아상과 정체성은 서사적이다. 인간의 기억이 서사에 의존한다는 주장도 있다. 아이가 명사와 동사를 결합하는 것을 배우는 유아기 때와 첫 기억이 일치한다고 한다.

 

서사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자기 대화에 포함되고 그것은 보편적인 특성을 지니는데 인간으로서 떼어낼 수 없는 심층구조라는 점을 다시금 환기한다.

 

현대의 나와 코르사코프 증후군

 

서사적 심층구조가 망가지기도 한다.

 

코르사코프 증후군은 자아상과 정체성이 유동하여 특정한 자서전적 기억을 되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사용되는 용어이다.

 

이 증후군의 정도는 병적이지는 않더라도 현대에 사는 나 또한 겪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무엇을 직업으로 삼아야 하는지."

"나는 누구와 어울려야 하는지."

"나는 어떤 공동체에 헌신해야 하는지."

 

이러한 질문에는 답변하기 어렵다. 질문 자체가 크고 정해진 답안이 없어 답변하기 어렵다.

 

또한 시대가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 학업과 취업과 결혼에 대한 일반 대중의 가치관은 1990년대와 2020년대는 통계청에서 통계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다르다. 그리고 가치관이 하나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해졌다. 또한 계속해서 발전하는 인공지능으로 인해서 미래는 산업혁명 수준으로 더 크게 변화할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시대의 유동성으로 인해서 그 시대에 속한 개인도 함께 액화하기에 자신의 자아상과 정체성을 일정한 방향을 유지하며 나아가기는 더욱 어려워 보인다.

 

나의 이야기에 현시대 속의 외부 서사가 합쳐지거나 개입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자신만의 이상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러나 유동성이 강한 외부 서사의 개입이 너무나도 수시로 이루어지면 비교를 통한 낙담이나 무가치한 우월감 속에서 인생에서 이룩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 끝은 정치에 종속되는 인생이 아닐까? 누군가가 내 인생의 문제와 삶의 터전을 바꿔줄 것이라고 공언하면서 한 표를 호소한다. 매우 매력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대서사와 개인의 이야기

 

이러한 배경에서 서사적 심층구조를 유념한다면 우리는 과거로부터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는 대서사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에 속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서사는 외부 서사이지만 유동성이 강하지 않다.

 

경전으로 꼽히는 것들은 문자로 기록되어 있어 그것에 대한 해석은 시대에 따라 변모하지만, 전달하는 내용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대서사는 그 서사에 속하려는 개인들에게 일정한 삶의 규율을 요구한다. 공동체와 대서사가 추구하는 이상에 대한 철저한 참여를 독려한다. 그리고 지혜로운 훈계가 있다. 참고할 수 있는 삶의 드라마가 있다.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여전히 내(나)가 하지만 동시에 대서사와 함께 나보다 앞서 그 길을 걸었던 무수히 많은 선배에게서 배울 수 있다.

 

특정 종교나 전통, 사상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세계적인 예술가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도 전기나 인터뷰를 보면 예술을 익히고, 예술가로 살아가는 데에 삶을 투신했다는 점에서 그가 하는 예술이라는 대서사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