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가장 이로운 점은 시간에 대한 이해를 구조화하는 방법이라는 데에 있다.
"나는 초롱이와 산책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초롱이에게 사료를 주며 맛있게 먹으라고 말했다."
이상의 문장에는 세 가지 사건이 존재한다.
하나는 초롱이와 산책하러 나갔다는 것이고, 둘은 산책을 끝내고 사료를 주었고, 셋은 밥을 먹는 초롱이에게 말을 건넸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비서사적 시간이 명시적으로는 없다.
그럼에도 화자인 나는 반려동물인 초롱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사적 시간을 압축할 수도 있다.
"한 달이 지났다. 초롱이는 이른 아침마다 산책 시간이 되면 귀여운 애교를 떨기 시작했다."
화자는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초롱이와 새벽에 산책하러 나갔다는 것을 아침에 보이는 초롱이의 행동으로 암시하고 있다. 또한 초롱이가 주인과 함께하는 산책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한 달 사이에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라는 사건이 누적되면(시간을 보내면) B라는 결과를 얻는다는 것을 서사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서사적 시간과 기계적 시간
시간과 능력의 관계에 대해서 널리 알려진 예시로 안데르스 에릭슨의 1만 시간의 법칙이 있다.
1만 시간이라는 기계적 시간에 서사적 시간이 포함되지 않으면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된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은 가능하지 않다.
"나는 매일 저녁 시나리오를 쓰고 있습니다."
"나는 피아노 연주를 연습합니다."
"나는 달리기를 하루 1시간씩 하고 있습니다."
명사와 동사가 결합하여 있다. 어떤 행동을 능동적으로 하지 않으면(의도적 연습) 1만 시간의 법칙은 가능하지 않다.
서사적 시간은 비서사적 시간인 기계적 시간과 낮과 밤과 계절의 변화와는 완전히 별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서사적 시간은 인간의 내적이거나 외적인 행위를 동반하기에 자기 지시적인 기계적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비서사적 시간 또한 서사적 시간과는 별개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내가 없는 비서사적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더라도 이 세상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죽음 이후로 의식이 없이 흙으로 돌아간다면 서사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나에게 이 세계는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이야기를 구성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내게 이 세계는 불가해한 명사들이 가득한 풍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풍경을 바라보는 것부터도 가능하지 않겠지만.
서사 지각
이처럼 시간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서사는 서사 지각으로서 이 순간에도 작동하고 있다.
"놀이터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다. 그런 아이를 멀리서 담배를 입에 문 남자가 건조한 눈길로 응시하고 있다."
이 문장을 이미지화해서 떠올리면 왜? 라는 물음도 함께 나타날 것이다. 아이는 왜 울고 있을까? 그리고 그런 아이를 수상해 보이는 남자는 왜 응시하고 있을까? 바로 그 왜? 라는 물음과 벌어진 상황에 대한 시간상의 전후 이야기를 파악하려는 것이 서사 지각이다.
"전시대 위에는 주광색 등불 아래에 외눈의 괴물이 길쭉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살결은 사람의 피부임이 분명하다. 크기는 닭 정도의 크기인데 팔도 다리도 없다."
이 문장은 앞의 문장에 비해 더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할 수 있다. 외눈의 괴물에 대한 묘사와 그것이 전시되는 상황만이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외눈의 괴물을 보는 사람마다 각자가 지닌 서사를 만드는 능력으로 이해를 시도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창작할 수 있다. 정답은 무엇일까. 라는 불안을 남기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명암: 밝게 비추거나 어둠에 잠기게 하거나
서사 지각은 사람에 따라 풍부하거나 협소할 수 있다.
서사 지각으로 세상을 밝거나 어둡게 바라볼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이십 대의 남자가 횡단보도를 건너다 운전자의 부주의로 교통사고를 당해서 하반신이 불구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남자는 자신에게 벌어진 사건을 해석하려고 한다.
사고를 일으킨 운전자에 대한 적개심과 함께 현재 상황에 자포자기하여 남은 인생을 되는대로 살아갈 수 있다. 술과 담배로 약해진 몸을 병들게 한다. 불운하니까. 그런 불운에는 원인과 결과가 없으니까. 이십 대라는 젊은 나이에 인생을 채 펼치기도 전에 너무나도 불편한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한다. 대체 왜 이런 고난이 내게 엄습했는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행복한 내일을 꿈꿀 수 있을까?
매우 불운한 사건임이 분명하지만 다른 선택지도 있다.
슬픔과 분노를 충분히 받아들이고, 하반신을 불구로 만든 사건과 함께 엄청난 고통을 겪은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를 사회에 전달할 수 있다. 또는 종교인이라면 지금 자신이 겪은 사고가 불운한 사고이지만 그것은 신이 보내는 메시지라고 해석한다. 이 사건을 내가 믿는 그분이 겪었다면 그분은 어떤 모습을 보이셨을까. 내가 그분에게로 돌아가기 전에 이 땅에서 내게 주어지고 감당해 내야 할 소명은 무엇일까. 이 사건으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또는 나보다 앞서 장애인이 된 이들이나 재앙을 겪은 이들과 대화하거나 수기를 읽어볼 수 있고 그들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로를 치유할 수 있다. 그러면서 사고 이전의 삶보다 더 밝은 내일을 희망하며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이들의 무수히 많은 사례를 안다.
이처럼 시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제공하는 서사와 서사 지각의 의미화는 중요한 함의를 제공한다. 내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가 다른 이의 이야기에 밝은 빛이 되거나 어둠에 잠기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장애인이 된 남자가 신입사원으로 회사에 채용됐다.
그 남자를 보고 어느 부장은 혀를 차며 정부의 장애인 고용 우대 정책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고용 장려금을 차라리 장애인에게 주면 되지 대체 장애인을 데리고 회사의 업무를 어떻게 제대로 수행한다는 말인가. 있으나 마나 한 신입사원이 들어왔으니 부장인 내가 앞으로도 모든 것을 주도해서 프로젝트를 이끌고 나아가리라.
또 다른 부장은 신입사원의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의지와 고통스러운 사고를 당한 사람 특유의 차분함을 눈여겨보고 자신이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르치려고 한다.
자신의 업무를 나누어서 주고 일을 시킨다. 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잘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명확하게 지적하고 성과를 냈다면 다른 부하 직원과 동일하게 인정해 주고 평가한다. 인격적으로 사람을 대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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