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서른이 넘어가고 있다. 개인정보는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 아님에도 진실한 글을 적으려면 내 안의 체험을 통과한 것을 용기내어서 적어야 한다. 어디까지 보여주어야 하는가는 전적으로 내 결정이기도 하니까 그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진실하게 적는다 그래야 글이 진실하다고 했다.
H.포터 애벗의 이 책을 읽어가다 서사란 "혼란에 맞서는 일시적인 유예"라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말이 가슴에 참 와닿았다.
서른이 넘어가며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나라는 사람도 그러하고 내가 경험한 사람들은 전부 자기모순적인 면이 있다. 완전히 통합된 실체로서의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통합성은 신만이 유일할 것이다.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는 전적으로 타락하고 분열된 존재로서의 인간, 시시때때로 감정이 변화하는 불완전한 인간, 목이 마르고 추위에 벌벌 떨고 무언가를 욕망하는 가련한 존재로서의 인간 등. 이처럼 사람에 대한 내 관점은 예정된 노화와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와 같은 인간에게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에 다다르게 된다.
내가 무한의 삶을 누린다면 그건 세계에 유해할 것이다.
이것은 내가 나를 비하한다거나 겸손해지고 하는 말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무한한 젊음과 무한한 삶이 가능하다면 이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다음 세대로 갈수록 더 가난하고, 더 헐벗고, 더 노동의 무게를 지는 것이 아닐까. 이에 반해서 젊음과 삶이 무한하니 오래산 사람일수록 힘과 능력을 더 많이 획득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그런데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예정되어 있고 노화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앞에서 언급한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이 섞여서 혼란함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혼란
따라서 내가 나 돌보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내버려두면 삶의 혼란이 자연스럽게 가속화된다. 내가 나를 철저히 질서 체계 속으로 구속하려고 해도 삶의 혼란은 멈출 수 없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서사에 통합성을 부여하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재미있고 유익하기도 하다.
일기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써본 경험이 있는 일기는 일상의 기록으로 모든 것을 담아내지 않고 서사와 마찬가지로 어떤 것은 선택하고 어떤 것은 배제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일상에서 유의미하다고 생각한 것을 기록으로 남겨두기 마련이다. 이러한 일기를 매일 적으면 삶은 여전히 혼란함으로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일관성이 생긴다.
나는 플래너를 일기처럼 사용했었다.
오늘의 할 일을 아침에 플래너에 적고 그것을 한 번에 하나씩하고 체크해가면서 생각나는 것들을 틈틈이 기록하고는 했었다. 그 결과는 삶에 일관성이 생겼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서사에 대한 개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내 플래너 안에 담긴 서사는 일관성은 있어도 통합적이지는 못하다.
성서
"성서의 한 부분에서 발견된 의미는 다른 곳에서 발견된 의미와 합치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1600년 전에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다고 한다.
내 서사인 일화에 통합성을 부여할 수는 없었다.
문예적인 서사 장르에는 내포저자가 있고 그의 의도를 아리며 읽으려는 것이 가능하고 그것은 내가 서사에 통합성을 부여하는 것이지만 내 플래너에 담긴 일화에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작가라는 목적지가 있고 기타 삶의 목표들이 적혀 있어서 통합성의 희미한 모습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통합적이다고 말할 수는 없다.
통합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라면 나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의외라고 생각하겠지만 신앙심이 깊고 신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교적인 인간과 신앙심 그것이 통합성을 획득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상호텍스트성이란 "모든 텍스트는(영화, 연극, 소설, 일화 등) 다른 텍스트들로부터 구성된다."라는 의미이다.
이 개념을 따른다면 일화를 적어가는 것의 바탕에는 다른 텍스트들이 있다. 그리고 그 텍스트 중에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성서도 포함한다.
성서의 텍스트로 나의 삶을 구성하려고 애를 쓴다면 통합적인 삶을 산다고 비로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을 기록하는 일기에서도 통합성을 발견할 수 있다.
신앙심은 종결이 아니라 상태가 아닐까?
내포저자와 실제저자가 다른 것처럼 여전히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더라도 그는 텍스트와는 다르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인간이라는 복잡한 생명체이다.
따라서 통합성이라는 것을 나와 같은 인간에게 적용하려고 했을 때 그것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심이 깊은 상태가(어떤 신념 체계에 대한 믿음과 유사한 것도 포함해서) 지속이 될 때라야 인생으로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작품을 빚어낼 수 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혼란과 질서의 조화로 인해 우리가 빚어내는 작품이 진실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조화가 있기에 인간의 다원성 또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이 글에서 나는 성서가 통합성을 가졌다고 말했다. 이는 이 책에서 언급한 내용이기도 하고(성서를 이 책에서 텍스트의 하나로 자주 언급한다. 저자의 글은 서사학을 매우 진지하게 다루고 있고 학구적이다. 그런 그가 책에서 인용하거나 참고하거나 소개하는 책들은 선별된 책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포함하여 저명한 학자와 작가와 목회자의 의견이고 나는 그들을 신뢰한다.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이 여전히 성서라는 오래된 책을 읽고 있고 인생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신학적인 글은 아니다. 이 글은 에세이로 그동안 읽고 배우고 체험한 것을 담아냈다. 내가 나를 바로잡으려는 목적과 독서의 깊이를 더하려는 목적으로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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