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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포터 애벗의 '서사학 강의' 독후감

서사 속 등장인물에 대한 사색

by 명민 에디터 2025. 3. 5.

등장인물은 현실의 우리와 같이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리고 그 시간이라는 것을 다루는 서사와 그 서사로 이루어진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적어도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우리 인간만이 가능하다.

 

등장인물행위보다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 어떤 사건이 있고 그 사건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의 연속은 다소 난해한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분석이 가능하다. A에서 B로 이동하고 B에서 C로 이동하는 등의 행위와 행위의 원인과 결과는 주의를 기울여서 작품을 읽다보면 충분히 독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내면을 파악하는 것은 등장인물이 텍스트라는 기호 상에서 나타낸 의도를 헤아려야 하는데 그 정보가 한정적이고, 더읽기덜읽기의 발생 가능성도 있으므로 행위의 파악보다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등장인물은 우리와 닮았지만 평면화는 피할 수 없다. 등장인물이 평면적 인물이 아닌 복합적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의 우리와 같이 복잡한 생명체를 기호로 온전히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서 단 하루 동안에 벌어진 일을 장편소설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떠오르는 생각이나 몸의 감각을 포착하고 담아내서 텍스트로 변환하는 기계가 있다면 단 한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분량의 장편소설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미래에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등장인물의 평면화는 유형과도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라는 복잡한 생명체를 그 불가해함으로 인해서 유형으로 분류하려는 것은 오래된 인간의 문화로 보인다.

 

점성술이나 명리학부터 시작해서 심리학에서 빅 파이브 성격 모델이나 MBTI 등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유형으로 분류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리고 친구에게 친구를 단순히 소개할 때에도 어떠한 인물이라고 말하는데 그 인물에도 유형이 들어 있다. 그러나 잘 쓰인 소설의 등장인물이나 친구에 대한 소개를 제대로 하다 보면 그 허구적이거나 실존하는 인물은 하나의 유형이 아니라 다양한 유형들이 섞인 인물로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서 유형과 유형이 때로는 충돌해서 보다 복잡한 유형으로 발전하는 모순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개념은 글쓰기는 연행적(performative)이라는 것이다.

 

연행이라는 개념은 글쓰기라는 행위는 어떤 목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특히 선거 전에 발표되는 정치인의 자서전과 같은 유형의 책은 더욱 분별력을 갖고 읽어야 한다. 대부분 유령작가에 의해서 쓰여지는 선거용 책으로 투표를 받기 위한 의도된 마스터플롯으로 작성되었으므로 그 책 내용으로 해당 정치인을 파악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그러므로 의도를 헤아리며 읽는 것과 동시에 징후적 읽기도 필요한 독서법이다. 주어진 텍스트 안에서 내포저자의 의도를 헤아리며 읽는 것은 텍스트를 충실히 읽어내려는 독자로서 좋은 의도이지만 그 텍스트 안에만 갇히고 만다. 그러나 징후적 읽기를 의도를 헤아리며 읽기와 함께하면 텍스트와 저자를 다각도로 조명이 가능하여 보다 풍부한 독해가 가능하다.

 

서사 속 등장인물에 대한 사색

 


 

이 구분선 밑으로는 적용하며 읽기를 바탕으로 글을 작성하고 있다. 따라서 『서사학 강의』의 내용을 바탕으로 내 삶에 적용하며 읽은 내용을 담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의 마스터플롯은 다음과 같다.

 

이때 그가 공개적인 목표로 삼았던 것은 자신의 독창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 유형에 따라서 전개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가 따랐던 유형은 기독교인 회심자의 모습이었으며, 이는 최초의 무지, 구원으로 향하는 바른 길에 관한 소식, 반복되는 일탈, 반복되는 다른 사람의 인도, 반복되는 노력의 갱신, 심오한 사유, 유혹, 분투, 고통, 회심의 결정적인 순간을 포함하는 마스터플롯에 속해 있는 것이었다. (264쪽)

 

사람을 유형에 따라 분류하거나 나 자신이 분류되는 것은 재미있고 참고할 수는 있지만 유형화에 갇히는 것 같은 기분도 들어서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앞에서 참조한 "기독교인의 회심자의 모습"과 같은 유형은 다른 유형들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이 유형은 각종 틀에 의한 분석을 통해서 나는 어떠한 유형의 사람이다가 아닌 어떤 방향으로 가는 유형이다. 그래서 이 유형의 사람은 기존에 지니고 있던 유형이 무엇이더라도 인간은 모두 신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과 직면한다. 그러면서 나 중심이 아니라 신 중심의 삶으로의 이행이 즉 회심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 유형의 사람들의 이야기인 간증에는 앞의 마스터플롯이 있다.

 

이 유형에는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생생하면서도 성장형의 유형이다.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은 결코 완성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살아가다 보면 마음에 때가 끼는 것과 죄는 피할 수 없고 그것을 깨끗하게 말씀으로 씻어내는 것 조차도 내 힘으로는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회심과 그것의 완성은 요원하다.